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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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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예법 논쟁, 기해예송(1659) – 남인과 서인의 운명을 가른 상복 다툼 조선 왕실의 예법 논쟁, 기해예송(1659) – 남인과 서인의 운명을 가른 상복 다툼조선 시대 정치사의 숨겨진 파도 중 하나가 ‘예송(禮訟) 논쟁’입니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그 가족들이 얼마 동안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나라 전체가 둘로 갈라졌던 사건. 특히 1659년에 일어난 기해예송(己亥禮訟)은 단순한 예법 논쟁을 넘어, 남인과 서인이라는 거대 정치 세력의 명운을 좌우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해예송의 배경, 전개, 그리고 조선 사회와 이후 정국에 남긴 의미를 깊이 있게 짚어봅니다. 1. 예법을 둘러싼 조선 왕실의 긴장 – 왜 상복이 문제였나?조선은 유교적 예법을 국시로 삼은 나라였습니다.왕실에서 상복을 얼마나, 어떻게 입는지는 단순한 가정 문제가 아니라 곧 국가의 ‘도리..
한양을 점령한 반란, 그 뒤에 숨겨진 조선의 균열 한양을 점령한 반란, 그 뒤에 숨겨진 조선의 균열이괄의 난(1624), 인조반정의 후폭풍우리가 한국사를 배울 때 임진왜란, 병자호란처럼 대규모 외침이나, 사화처럼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는 익숙합니다.하지만, 그 사이 ‘내부 분열’로 한양이 점령당한 초유의 사태,바로 이괄(李适)의 난(1624)은 의외로 교과서에서 짧게만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오늘은 조선 중기의 가장 극적인 쿠데타,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인간 군상과 권력의 민낯을 살펴보려 합니다.인조반정, 그리고 서인 내부의 갈등이괄의 난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을 알아야 합니다.광해군이 즉위 후 정치적 불안과 중립외교, 대북파 숙청 등으로 서인(西人) 세력의 불만을 샀고,결국 서인과 남인 연합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조를 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