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훈민정음 창제

우리의투자 2025. 7. 31. 12:00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훈민정음 창제

백성을 위한 글자, 조선을 위한 사랑

세종의 애민정신과 훈민정음 창제

 

1. 왕의 자리에 오른 세종, 무엇이 달랐나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 믿고, 늘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펼쳤습니다.
임금이 직접 백성을 살피고, 정책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실행한 지도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출신 신분, 문해력,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문자였습니다. 당시 공식문자인 한문은 학문적 장벽이 너무 높아 백성들이 배울 수 없었습니다.
말은 있는데 글이 없다는 현실은 세종에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2. 백성을 위한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

1443년, 세종은 조용히 새로운 문자의 제작을 시작합니다.
국가 기밀로 진행된 이 작업은 철저히 실용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듬해인 1444년에 초안이 완성되었고, 1446년 정식 반포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곧,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스스로 배우고 읽고 쓸 수 있게 하겠다는 세종의 철학이 담긴 이름이기도 합니다.


3. 훈민정음의 구조와 특징

훈민정음은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문자 체계입니다.

  • 발음기관을 본뜬 자음 설계
    예: ㄱ(혀뿌리), ㄴ(혀끝), ㅁ(입술) 등
  • 하늘, 땅, 사람의 철학이 담긴 모음 설계
    ㆍ(하늘), ㅡ(땅), ㅣ(사람)

총 28자로 시작한 훈민정음은 창제 당시부터 과학적인 구조와 사용 편의성을 갖춘 문자였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세계 언어학자들에게 극찬받고 있습니다.


4. 반대와 비판, 그럼에도 밀어붙인 세종

당시 양반과 유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비문자’라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한문을 권위로 삼던 이들은 훈민정음의 등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직접 예문을 만들고, 훈민정음 해설서를 편찬하며 훈민정음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또한 여진어, 몽골어, 조선어 번역에 훈민정음을 활용하며 다방면에 실용적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5. 훈민정음의 활용과 확대

세종은 훈민정음이 단순히 글자에 그치지 않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게 합니다.

  • 월인천강지곡: 부처의 가르침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찬불가
  • 농서 번역: 농사직설 등 실용 지식을 백성에게 전달
  • 법률과 행정에 일부 사용: 지방 백성들에게 정책을 쉽게 알리기 위함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으며, 글자가 곧 권력의 수단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6. 애민정신의 완성, 문자에서 시작하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 창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세상과 소통하게 만드는 민주화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말을 갖고 있으면서 글이 없어 외국 문자를 빌려 써야 했던 조선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은 자존심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세종은 이를 통해 왕의 역할이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돌보는 자’임을 몸소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세종의 애민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지도자들의 교본이 되고 있습니다.


7. 오늘날, 훈민정음이 남긴 것

한글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입니다. 세종의 철학과 백성 사랑이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글은 이제 한국인의 문화 정체성과 창의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종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글자를 쓰고 있었을까요?


마무리하며..

세종은 백성을 위한 지도자의 표본이었습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는 단연 빛나는 유산이며,
이 유산 속에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백성을 바라본 임금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세종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할 가치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애민’, 즉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